오늘은 비가 왔다.
창밖 소리에 눈이 떠졌고, 원래 같았으면 이불을 다시 덮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늘은 걷고 싶었다.
우산을 챙기고 나서는데, 신발이 젖을 걸 알면서도
딱히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비는 생각보다 더 부드러웠고, 바람은 살짝 차가웠다.
길가에 고인 물을 밟지 않으려 조심하면서도
어느 순간엔 그냥 툭툭 밟고 지나가게 되었다.
한 시간 정도를 걸었다.
이어폰도 없이, 휴대폰은 그냥 주머니에 넣고.
비닐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와
내 발 아래 젖어가는 보도블록 소리가 그 시간의 배경음악이었다.
걸으면서 아무 생각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생각을 너무 많이 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오래된 마음의 무게들이
물에 젖은 흙처럼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마음에 걸렸던 말들,
떠나간 사람들,
왜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을까 싶었던 순간들이
비에 씻긴 듯이 조용히 정리됐다.
해결된 건 없었지만,
잠깐은 내려놓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꼭 답을 찾지 않아도,
때론 그냥 흘려보내는 시간도 필요하다는 걸
오늘 걸으며 다시 느꼈다.
빗속을 걷는 일은
조용한 사람이 되는 연습 같기도 하다.
누구에게도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
굳이 웃지 않아도 되는 시간.
비는 아직도 그치지 않았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조금 가벼워진 마음을 느꼈다.
무겁고 축축한 공기 속에서도
숨이 쉬어지는 날이 있다.
오늘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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